美 Slate Auto가 주류 트렌드에 역행하는 단순함·합리적·실용성을 갖춘 전기 픽업트럭으로 오늘날 자동차 업계의 고민에 대한 돌파구를 제시했다. 향후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실용성 중심 소비와 맞춤형 대량 제조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열어갈지 주목된다.
한국자동차연구원(KATECH)은 9월 1일 발표한 ‘트렌드에 역행하는 기업, Slate Auto’ 보고서를 통해 美 스타트업 ‘Slate Auto’社가 실용성과 합리적 가격을 표방한 전기 픽업트럭의 출시를 예고했다고 설명했다.
Slate Auto는 첨단 기능 경쟁에 집중하는 기존 완성차 업계와 달리, 최소 기능과 모듈형 구조를 앞세운 컴팩트 전기 픽업트럭을 2만달러 중반대 가격으로 ’26년 미국 시장에 출시할 예정이다.
Slate Auto가 출시 예정인 BEV 픽업트럭인 ‘Slate(가칭)’는 고가의 인포테인먼트 시스템 등을 제외하고 일상적 범위를 주행할 수 있는 고전압 배터리와 필수적인 운전자보조시스템(ADAS)만을 장착했다. 또 다른 특징은 모듈형 설계로, 기본형은 2도어 2인승 픽업트럭이지만 바디 킷을 활용해 5인승 SUV로 변형하거나 목적에 따라 다양한 액세서리를 장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이처럼 아직 양산 단계에 이르지 않았지만, PBV(목적 기반 차량)와 같은 실용적 콘셉트와 합리적 가격을 갖춘 전기 픽업트럭이라는 특장점이 미국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고 있다. ’22년 회사 설립 이후 Amazon의 Jeff Bezos 외 유력 펀드사가 투자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차량 공개 직후 온라인에서 다양한 차량 개조 아이디어가 공유되면서 10만건 이상의 구매 예약이 누적됐다.
CEO인 Barman에 의하면 실용성과 가격 대비 성능을 중시하는 평범인 미국인, 생애 첫차 구매자, EV에 관심이 있으나 복잡성을 두려워하는 시니어층 등이 Slate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분석됐다.
보고서는 Slate Auto의 전략은 저비용 구조로 잠재 수요를 공략하고, 판매 이후에도 하드웨어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들의 시장전략은 중·대형 픽업트럭이 주류인 미국에서 틈새 시장인 컴팩트 픽업트럭 부문에 집중하되, 신차 가격 상승세에 역행하는 가격을 책정, ‘Made in USA’ 강조로 수요층 확대를 도모하는 것이다.
최근 미국에서 풀 사이즈 SUV·픽업트럭에 대한 소비자 선호도 감소세가 나타나고 있음에도, 전기 픽업트럭은 모두 6,000lb 이상의 중·대형 급이며 소형 전기 픽업트럭 선택지는 전무한 상태다.
이는 고가 모델로 수익성을 추구하는 완성차사의 전략과 BEV 저비용화의 어려움이 맞물린 결과로, Slate Auto의 시도는 여타 기업이 경시한 세그먼트에서 공급-수요 간극을 메우고자 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한편, Slate Auto는 미국 내 설계와 생산을 강조하며 자동차 산업 부흥이라는 사회적 담론에 호응해 자국산 차량을 선호하는 보수적 픽업트럭 소비층을 흡수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제품전략으로는 단일 모델·파워트레인을 기반으로 생산 공정을 단순화해 저비용 구조를 달성하고, 모듈러 설계로 사후 하드웨어 업데이트·개인화 가능성을 열어 수익원(revenue stream)을 확대했다.
Slate는 단일 파워트레인의 픽업트럭 1개 모델만 생산하는데, 차량 바디(structural body)에는 페인트 대신 전기 코팅만 적용하고, 외부에는 스탬핑·용접·도장 공정을 생략한 폴리프로필렌 패널을 장착했다.
이처럼 극도로 단순한 설계·생산 방식은 초기 투자 및 공정 비용을 절감하고, 차량 형상 변경을 위한 바디킷 장착을 용이하게 해 추가 개발 없이 차량 라인업을 확대하는 효과가 있다. 소비자는 구매 이후 DIY 방식으로 색상을 입히거나 부품을 신규 장착할 수 있는데, 이는 Slate Auto가 추가 수익을 창출하고 제품에 대한 고객 몰입 및 열성 지지층 확보를 가능케 한다는 설명이다.
다만 보고서는 美 연방 IRA 세액 공제 일몰로 실 구매가가 상승할 경우 전략적 이점이 약화되며, 그에 따라 Slate Auto는 향후 심화될 경쟁 속에서 고객 확보가 어려울 수 있다고 분석했다.
Slate Auto는 대당 최대 7,500 달러의 IRA 전기차 세액 공제를 통해 2만달러 이하의 실구매가 달성을 목표로 했으나, ’25년 9월 제도 종료가 확정되면서 내연기관·HEV 모델과의 경쟁이 불가피하다. 최근 20억달러를 투자해 ’27년부터 중소형 전기 픽업트럭 등 저렴한 전기차 생산을 공언한 Ford, Slate와 동급의 내연기관 픽업트럭 시장에 진입할 Toyota도 잠재적인 경쟁상대로 부상했다.
그간 미국 주요 전기차 스타트업 다수가 개발-양산-수익화로 이어지는 ‘죽음의 계곡’을 극복하지 못했다는 경험적 사실은 Slate Auto의 미래에 놓인 또 다른 부담 요인이다.
Slate Auto는 자금 조달, 시설 확보, 시제품 제작에서 여타 스타트업 대비 빠른 행보를 보여왔으나, 향후에도 여타 스타트업이 겪은 기술·경영상 난관에서 자유로울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특히 언론에서 언급된 ’27년 이후 연산 15만대 목표 달성은 양산 체제의 안정적 작동을 전제로 하나, 공급망 관리의 제약과 제한된 미국 전기차 시장 규모를 감안할 때 상당히 도전적인 과제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실용성 중심 소비, 맞춤형 대량 제조라는 새로운 트렌드를 여는 의미가 있다. 글로벌 경제 환경 변화 및 인플레이션 등으로 미국 내 차량 구매 심리가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 향후 美 자동차 시장에서 실용성의 가치가 부각될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이다.
공급망 재편, 금리 상승, 차량 안전·편의 기능 강화 등으로 미국 내 차량 구매·운용 부담이 커지면서 경제적 압박을 받는 소비자들은 본질에 충실하면서도 합리적 가격을 갖춘 제품에 주목하는 중이다.
한동안 미국 자동차 시장은 ‘더 많이, 더 크게’의 풍요 지향을 보여왔으나, 사회적 불확실성이 지속되면 Slate Auto가 주창하는 실용성이 향후 차량 구매 트렌드의 중심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자동차의 맞춤형 대량 제조가 기술적으로 성숙한 가운데, Slate Auto는 기업이 소비자 요구사항을 어떻게 파악하고 활용할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차량 공용 플랫폼 △디지털 트윈 기반 모델링·시뮬레이션(M&S) △로보틱스 발전 등 맞춤형 대량 제조의 공급 여건은 성숙했으나, 기업이 개별 고객의 구체적 수요를 파악하는 수단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Slate Auto는 생산·개조 과정에 고객을 참여시키고, 커뮤니티로 아이디어를 수렴하며, 외부 기업의 부품 생태계 유입을 촉진함으로써 맞춤형 대량 제조 트렌드의 도래를 위한 사업 모델을 제시했다.
Slate Auto의 도전은 오늘날 자동차 업계가 공유하는 현실적 고민을 상징하고 있기도 하다. SDV 등 소프트웨어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자동차 산업 전환기에서, 완성차 업계는 소프트웨어 기반의 소비자 니즈 발굴과 실질적인 수익화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동차의 소프트웨어화는 연구개발, 기능 최신화, 서비스 확장 등을 위한 폭넓은 투자를 수반하지만, 단기적 관점에서 소프트웨어 기반의 수익 창출 기회가 제한적이라는 점이 업계의 고충이다. 고도화된 소프트웨어 구동에 필요한 차량 내장 하드웨어의 진부화 해결, 탑승자의 휴대용 디바이스가 아닌, 자동차를 통해서만 제공할 수 있는 차별화된 기능·경험의 발굴은 또 다른 과제이다.
보고서는 “Slate Auto는 소프트웨어보다 하드웨어, 복잡함보다 단순함, 압도적 기능보다 친숙함을 내세워 주류 트렌드에 역행함으로써 오늘날 자동차 업계의 고민에 대한 돌파구를 제시한 사례”라고 밝혔다.